소박한 작문2010. 7. 7. 06:43

무엇인가 강력한 보상이 내겐 필요했다. 2008년 8월 대학교 졸업 후, 언론사 및 여타 기업에 들어가려고 취업준비를 한 것이 1년 4개월. 올해는 대학원에 들어가 보겠다고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정책학 공부를 시작했다. 쉼 없이 달려왔지만 무엇 하나 이룬 것 없는 자신에게 항상 난 가혹하기만 했다. 채찍질만 하기 보다는 당근을 주자는 마음에서 대학원 필기시험 이후 여행을 계획했다. 내가 선택한 여행지는 바로 제주 올레길이다. 지난 2월 우연히 제주 올레길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사람들은 올레길에 왔다 가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했다. 어떻게 자연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 나도 문득 지난 2년간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싶어졌다.

 

6월초 한 대학원 필기시험을 끝으로 길게만 느껴졌던 5개월여의 수험생활이 끝났다. 그리고 이틀 후 나는 새벽부터 서둘러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탈출하는 것이 대학 졸업 후 처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것에도 쫓기지 않고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놀면서, 쉬면서, 걷다가 오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 이후 내 삶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생각해보기로 했다. 동반자는 없는 편이 나 자신과 올레길을 대면하기에 더 좋을 것 같았다. 아침 11시경 올레길 1코스 시작점에 도착해 여행 일정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첫날 1코스와 5코스, 둘째 날 6, 7코스, 마지막 날은 12코스를 걷는 강행군이었다. 과연 걸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올레 패스포트를 만들고 나니 빨리 스탬프를 받고 싶은 마음에 힘이 솟았다. 날씨는 조금 더웠지만 굴하지 않고 도보 여행을 시작했다.

 

1코스는 코스 초반의 말미오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약간은 가파른 경사를 따라 말미오름에 오르면 성산 일출봉과 우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동안 고생한 자신에게 수고했다는 한 마디를 건네려니 마음이 벅차올랐다. 그 외에도 1코스는 종달리, 오조리 마을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들을 지나갔다. 그 중 길거리의 작은 오락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을 보니 나도 옛 생각이 나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올레꾼들을 위한 암호라고 하는 파란색 표지를 찾으며 가는 것이 처음엔 쉽지 않았다. 나뭇가지에 걸린 파란색 천이나 바위에 새겨진 파란색 화살표에 의지해 코스를 따라가야 하는데 마치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었다. 가끔씩 양 갈래 길을 두고 헤매다 파란 표지를 발견할 때면 ‘당신은 길을 잘 찾아가고 있어요.’라고 내게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인생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내 삶에도 저런 표지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성산일출봉을 지나 넓디넓은 광치기 해변에 도착하니 오후 4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조급한 마음에 서둘러 5코스로 이동해야만 했다.

 

5코스 시작을 느지막이 하는 바람에 코스의 2/3지점에 도착할 때엔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의 충고에 따라 올레길을 이탈해 도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직선으로 난 도로를 따라 죽 걸으면 서귀포시도 나오고, 6코스 시작점인 쇠소깍도 나온다고 하셨다. 예약한 숙소에서 거기로 마중을 나온다고 했으니 꼭 찾아가야 했으나 걷고 걸어도 그곳은 나올 줄 몰랐다. 1시간 반을 걷다보니 어느새 쇠소깍을 지나쳐 6코스 1/4 지점까지 와있었다. 이리저리 헤매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천신만고 끝에 숙소에 돌아오면서 느낀 것은 ‘절대 무리하지 말자’였다.

 

오랜만에 많이 걸은 탓에 둘째 날은 조금 힘에 벅찼다. 먼 길을 가려면 천천히 가야한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침 9시경 7코스에서 출발하면서 속도에 구애받지 않고 쉬엄쉬엄 가기로 마음먹었다. 첫날과 달리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하지만 궂은 날씨도 빼어나기로 소문난 7코스의 절경을 가릴 수는 없었다. 가장 인기 있는 코스로 알려진 곳답게 7코스는 올레꾼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사람이 별로 없던 1, 5코스와 달리 시끌벅적 사람들의 말소리를 들으면서 걸으니 더욱 힘이 났다. 연인끼리 와서 걸어가는 올레꾼만 빼면 사람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 같은 홀로 여행자도 눈에 띄어서 그들의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당 올레(해안을 따라 만든 바닷길)를 걸으면서 느낀 점은 밑창이 두꺼운 신발이 필수라는 것이다. 거의 맨발과 다름없는 운동화로 걸으니 발바닥 지압을 쉬지 않고 받는 기분이었고, 다리 힘이 남아있지만 발바닥이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다. 먼 여행에는 알맞은 신발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또한 인생과 연관시키게 되었다. 무조건 뛰려고 하지 말고 일단 맞는 신발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7코스를 지나 8코스 중간 즈음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광활한 바다를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평안해지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자연에서 힘을 얻는다는 말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이번 여행의 올레길 여행은 8코스 중간 지점에서 끝났다. 버스를 타고 12코스 근처의 숙소로 이동했지만 다음날은 도저히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한림공원이나 협재 해수욕장 같은 유명 관광지를 천천히 둘러봤다. 하지만 유료 입장임에도 올레길에서 받은 감동이나 희열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과욕과 준비 미비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기는 했지만 제주 올레길은 내게 추억을 주었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었다. 이후 대학원 합격 소식이 들려와 지금은 입학 준비에 한창 들떠서 살고 있다. 남은 한 해를 열심히 살다 겨울 즈음에 다시 한 번 올레길과 조우해야겠다. 이번엔 천천히, 올레길을 온 몸으로 느끼면서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