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작문2008. 12. 20. 15:58

베네딕트 앤더슨은 민족을 가리켜 ‘상상의 공동체’라고 말했다. 민족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구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는 민족을 근대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역사적 구성물로 규정한다. 반면,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민족보다 종교에 의해서 하나로 단결하는 종교공동체적 성격이 강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이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단일민족이라는 명제도 거짓이 된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그들이 단일민족인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상당한 애족심을 갖고 있다. 요즘 세계화의 추세에 맞춰 민족주의를 지양하자는 목소리가 있지만, 스포츠 경기 등에서 나타나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 정서는 여전히 강하다. 그렇다면 민족주의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갖는 함의는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볼 때, 민족주의는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때로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야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또는 피식민지 국가가 독립을 달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한 학자는 민족주의를 ‘야누스의 얼굴’이라 부르기도 했다. 자명한 것은 민족주의가 그 어떤 이데올로기보다 강한 응집력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민족을 부정하고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주창하던 공산주의도 결국 민족주의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전 세계 공산국가들이 몰락한 상태에서 결국 살아남은 것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 즉 주체사상을 확립했던 북한이었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세계 역사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한편, 민족주의가 갖는 응집력과 역동성이 지배층에 의해 악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히틀러가 독일 군중의 민족주의를 자극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사례이다. 자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족주의는 타민족에 대한 지배 욕구로 비뚤어졌고, 그 결과 수천만의 생명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또한, 민족이라는 구실로 민족 내부의 계급 간 불평등과 갈등이 은폐되기도 한다. 한국의 경우 박정희 정권 시절, 민족의 번영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정당화되어지곤 했다. 작년 정부에서 만든 한․미 FTA 홍보 광고도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내용인 걸 보면, 민족주의는 권력층에게 매력적인 도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한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 때문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이며, 세계열강들에 의해 둘러싸인 지리적 환경을 갖고 있다. 분단된 한국의 지상과제가 통일이라는 것은 현재도 유효하다.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 경제적 실익 등 그 어떤 요인도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추진력에 필적하지 못한다. 민족주의는 통일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인 것이다. 또한, 주변 열강들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것도 민족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중국이나 일본와의 영토, 역사를 둘러싼 분쟁에서 패하지 않기 위해 민족 단결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민족주의는 부정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앞으로 미래에는 민족주의가 소멸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21세기에 오히려 강화될 것이라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다자간 경제협력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양자 간 협상이 늘어나는 추세에서 국가 간의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심해질 수밖에 없고, 이런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각국이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논리이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경제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살아남기 위해 민족주의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때의 민족주의는 배타적인 단점을 보완한 개방적인 민족주의여야 하겠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