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작문2008. 12. 20. 15:58

일본에서 「파견의 품격」이란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파견직 여자 사원이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도맡아 처리해나가는 내용이다. 극 속의 여자 주인공은 수십 개의 자격증과 독보적인 능력을 지닌 ‘슈퍼 우먼’이다. 때문에 회사에서는 3개월 계약직임에도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반면 정규직을 꿈꾸며 파견직으로 입사한 여사원이 있다. 그녀는 늘 업무에 최선을 다하지만 차별대우를 받다가 결국 기간만료로 퇴사하게 된다.

 

드라마는 여 주인공과 나머지 파견직 인물들을 대비시킴으로써 일본 내 비정규직 문제를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비정규직의 수뿐만 아니라 근로조건이나 기본적 권리 측면에서 문제가 일본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 한국 사회이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8년 3월 현재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53.6%인 858만 명에 이른다. 쉽게 말해 한국 노동자의 둘 중 하나는 비정규직이라는 소리다. 여성의 경우만 보자면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같은 통계에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수는 415만 명으로 세 명 중 두 명꼴이다. 일본 드라마에 등장했던 여자 주인공 같은 ‘알파걸’은 도무지 등장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비정규직의 증가는 전 세계적인 추세라 하지만 세계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평균 30%대의 비정규직 비율을 훨씬 웃돈다. 고용이 불안정해지면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장기적으로 경제 구조가 취약해질 것이다. 비정규직의 비율을 낮출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조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용직으로 갈 수 있는 통로가 막혀있다는 데서도 발견된다. 유럽의 경우 비정규직 노동자가 상용직으로 전환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용에 대한 불안정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비정규직으로 시작해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작년 우리은행에서는 비정규직에 대한 대안으로 ‘중규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지만 이 역시 변종 비정규직이 고착화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비교하여 임금부터 각종 복지혜택에 이르기까지 갖은 차별대우를 받기 때문에 정규직 전환을 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그의 저서에서 20대의 95%가 비정규직이 될 것을 예언하고 이러한 경제구조가 결국 대한민국 사회 전체를 절망에 빠뜨릴 것을 경고하고 있다. 현 정부 들어서 기업인들은 저마다 올해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현재의 일자리 사정은 그리 좋아보이질 않는다. 500여일을 넘게 싸워온 KTX 여승무원들이 고공투쟁을 하고 있고, 1000일 넘게 싸워온 기륭전자 노동자들이 단식 투쟁 끝에 병원에 실려가는 것이 현실이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정도로 심각해진 비정규직 문제를 풀기 위해 국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 이를 남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고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국민들의 자세 또한 필요하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