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 이슈2009. 2. 5. 12:03
[김창균 칼럼]'실행 버튼'이 망가진 한나라당   조선일보 1월 7일 30면

20년 전 막 입사했을 때 얘기다. 동료 하나가 수습기자 강의에 들어온 정치부 데스크에게 도발적으로 물었다. "똑같은 말을 해도 여당 것만 크게 보도하는 이유가 뭡니까." 난처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답변이 명쾌했다. "야당 말은 꽝이지만, 여당 말은 그대로 되거든."

그 데스크의 설명이 전 세계적으로 통하는 모범답안이라는 사실을 훗날 미국 정치학 서적에서 확인했다. "야당은 고함을 질러도 뉴스가 안 되지만, 여당은 재채기만 해도 뉴스가 된다"는 것이다.

여당 말에 힘이 실리는 이유는 여당 손에 '실행 버튼'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당 컴퓨터 화면엔 '프로그램을 실행하시겠습니까'라는 대기 명령이 늘 떠 있다. '예스'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프로그램은 작동한다.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속한 여당이면서, 국회에선 다수당이기도 하다. 국회에서 법을 만들고, 행정부를 통해 그 법을 집행해서 세상을 바꿔나갈 힘이 있다. 정치학 교과서대로라면 말이다. 그러나 2009년 1월 '현실 속의 한나라당'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나라당은 지난 연말 미디어법, 한미 FTA 비준동의안, 금산분리 관련법 등 여야 합의가 어려운 쟁점법안들을 처리하겠다고 결심했다. 보통 민주주의 프로그램에선 '여야 합의 무산'이라는 조건이 성립하면 표결과정으로 이동한다. 그랬다면 재석 299석 중 172석으로 과반 의석인 한나라당 뜻대로 법안이 통과됐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회엔 야당의 '표결저지'라는 토착형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다. 이번에도 그 바이러스가 작동했다. 표결저지로 오작동이 이뤄질 때는 대처 매뉴얼에 따라 두 가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 첫째, 국회의장과의 공조체제 구축이다. 표결이라는 일반도로가 막힐 때는 의장의 직권상정이라는 우회도로만 남기 때문이다. 둘째, 본회의장 의장석을 확보해야 한다. '의장은 반드시 의장석에서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는 국회법 조항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에선 야당의 표결저지가 수시로 발생하기 때문에 역대 여당은 늘 이 두 가지를 챙겨놓곤 했다. 그래서 야당의 반대 속에서도 필요한 법안을 통과시켜 왔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이런 대비에 소홀했다.

한나라당은 국회의장 직권상정을 자기 주머니 속 공깃돌인 줄 알았다. '국회의장은 친정인 한나라당 편을 들어줄 것이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회의장은 집권세력의 꼭두각시로 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한나라당이 빚 독촉하듯 직권상정을 요구했을 때 의장은 "협의를 더 하라"고 틀고 나왔다.

한나라당은 본회의장 의장석도 민주당에게 내줬다. 한나라당은 의원 수도 민주당보다 두 배 이상 많고, 본회의장 출입을 관리하는 국회 사무처도 같은 식구다. 한나라당 의원 3분의 1씩만 돌아가면서 본회의장을 지키겠다는 성의만 있었다면, 국회는 한나라당이 본회의장을 지키고 민주당이 문밖에서 아우성치는 정반대 시나리오가 전개됐을 것이다. 그렇게 한나라당 의원들이 몇 날 며칠을 본회의장을 지키고 있었다면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않겠다고 마냥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웰빙 체질이 몸에 밴 한나라당 의원님들은 그런 성가신 일을 몸소 행하지 않았다. 대신 국회 사무처에 "문단속 단단히 하라"고 지시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성탄절 밤을 틈타 잠입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중요한 고지(高地)를 빼앗겼다.

지난 연말 한나라당은 "새해 새 출발을 위해 해를 넘기기 전 쟁점 법안을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했었다. 한나라당은 이 다짐을 지키지 못했다. 안일한 태도로 우물쭈물하다가 '실행 버튼'을 먹통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여당 모양새가 이러니 갓 입사한 후배가 "여당 말을 왜 더 대접하느냐"고 20년 전 질문을 해 온다면 어찌 해야 하나. 하긴 여당 '말값'이 떨어져 여당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지도 오래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