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 이슈2009. 2. 5. 12:01
[야!한국사회]우리, 난장이들의 분노  한겨레신문 1월 22일 22면  

얼마 전, 한 잡지의 신년호에서 조세희 작가의 강연 녹취록을 읽었다.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간에 ‘행복하다’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선생의 지적에 끄덕이며, 나 스스로는 도둑이고 또 바보일 거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딸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작은 행복을 느끼고, 패기 없는 활동으로 자족하고 있던 터였다. 그때, “우리는 불행으로 동맹을 맺었다”고 말하는 선생의 꼿꼿한 노년은 늘어진 나의 불혹을 흔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용산 참사 속보를 전해 들으며,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겹쳐졌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지옥에 살지 않는 우리들은 그저 “벽돌 공장의 굴뚝 위에 올라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난장이의 꿈”을 꿀 뿐이다. 그러나 소설 속 난장이 아버지는 그 굴뚝 위에서 종이비행기 대신 스스로를 던져 놓아버린다. 거인을 상대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난장이의 무력한 분노와 꿈은 까만 쇠공이 되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다.


 굴뚝, 골리앗 크레인, 건물 옥상의 망루. 지상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분노가 마지막으로 내몰리는 곳이다.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우리들 힘없는 난장이들은 살 수 없어 그곳에 서기도 하고, 어떻게든 살아 보기 위해서 그곳에 서기도 한다. 소설의 난장이와는 달리, 용산의 철거 세입자들은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올라갔지만, 주검이 되어 내려와야 했다.


 물론 누가 죽음의 직접 원인을 물어야 한다. 과잉 진압 여부를 밝히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와 함께 무엇이 그들을 망루에 세워 목숨을 걸어야 하도록 했는지도 물어야 한다.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용산구청의 펼침막. 삶의 뿌리를 뽑고도 바늘만큼의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개발의 성채’. 용역업체가 아니라 자신들을 향할 공권력에 대한 불신. 정당한 보상과는 거리가 먼 차가운 법규. 분명히 이 모든 거인들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금 더 나아가 생각해 본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분노가 너무 늦게 왔다는 사실이 아닐까. 지상에서는 난장이들의 이야기에 어느 누구도 귀를 기울여 분노를 함께하지 않았다. 죽음 이전에 그들은 우리와 함께할 광장이 없었다. 그래서 광장의 고독보다는 망루와 골리앗, 굴뚝의 위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삶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지지받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세상이라면 우리의 시대가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불행의 동맹”을 보지 못하고, 삶의 절규를 듣지 못한 우리의 무능한 관성. 너무 늦은 분노를 이끄는 부끄러움이 필요한 것이 아닐는지. “폭력시위의 악순환”을 운운하는 무례한 권력에 정치적, 법적 책임을 제대로 지우기 위해서라도, 이미 때늦은 분노를 지속시킬 힘이 되는 부끄러움이 필요하겠다.


 2007년 여수보호소 화재로 10명의 무고한 생명이 죽었지만, 세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죽음의 절규를 생생하게 기억해야 할 그곳이 리모델링됨으로써 문제는 종결되었다. 여전히 ‘불법 사람’들이 적절한 통제와 감시 없이 쇠창살에 갇혀지고 있다. 분노가 있었지만, 그 분노를 지속시킬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들 모두는 불행으로 동맹한 난장이들이다. 작은 분노와 부끄러움이 함께할 광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보지 못하는 눈먼 권력의 “과잉 진압 악순환”이 계속될 것이다.


정정훈 변호사
Posted by 온자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