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상2008. 12. 20. 13:52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고지식한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엔 자식들과 떨어져 부인과 단둘이 살았습니다. 그 모습이 외로워 보이던 그였지만, 명절 때가 되어 가족들을 만났을 땐 반가운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그런 노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손자가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어렸을 적 그의 말을 무척 잘 들었고, 공부도 썩 잘 해서 집안의 장손 역할을 훌륭히 해냈습니다.

 

소년에게 기대가 컸던 노인은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천자문을 가르쳤고, 명심보감을 외우게 했습니다. 또, 웃어른을 대하는 예절과 조상께 감사하는 마음, 식사 예절 등을 아주 엄격하게 가르쳤습니다. 워낙 무뚝뚝했던 노인은 소년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엄하게 잔소리만 늘어놓곤 했습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그 잔소리 하나하나가 소년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겠지요.

 

하지만 소년은 노인의 잔소리를 너무도 싫어했습니다. 그래도 어린 시절 그는 참고 또 참으면서 노인의 요구에 잘 따랐습니다. 그가 사춘기라는 것을 맞은 후부터일까요? 소년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노인을 보는 눈에는 이유 모를 반항심 같은 것이 생겨났고, 소년은 노인에게 직접 대들지 않는 대신 그에게 쌀쌀맞게 대했습니다. 자신을 이해 못하고 지나치게 기대만 하는 노인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폭발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좀 더 나이가 들자 깨닫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얼마나 소년을 생각하는지, 그에게 주어진 요구들도 다 그를 위한 노인의 배려였다는 것을. 그리고 소년에게 노인은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분이라는 걸. 그래서 소년은 그를 뵈러 갈 때마다 잘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노인과 함께 있을 때면 노인에게 짜증부터 나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에 대한 그의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소녀도 모르는 사이에 소년이 노인을 닮아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중에 노인이 되어 자신의 할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러면서도 노인을 절대로 닮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는 소년이 얼마나 우스운지요.

 

전 정말 나쁜 녀석입니다. 그 소년이 바로 저거든요. 전 정말 할아버지께 잘 해드린 게 없는데 아직도 세상에서 절 제일 사랑하시는 할아버지를 뵐 때면 너무 죄송한 맘이 듭니다. 제가 이 다음에 커서 집안을 빛내는 큰 인물이 되어서야 할아버지께 용서를 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들어 제 그런 모습을 기대하시는 할아버지께서 많이 약해지셨습니다. 옛날의 그 위엄있고 당당하시던 모습도 많이 잃으시고, 당신이 저의 짐이 될까봐 많이 걱정하고 계십니다. 옛날엔 안 그러시던 분이 말이죠. 전 정말 그 분만 생각하면 알 수 없는 눈물이 흐르곤 합니다. 저도 그 분을 무척 사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께 고백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토록 꺼내기 어려웠던 말... "사랑해요, 할아버지. 제가 커서 성공할 때까지 오래오래 사세요. 앞으로 정말 효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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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발견한 고등학교 교내 신문, 그리고 2학년 1반 이혁진 군의 글.

10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반성을 지금도 하고 있구나.

Posted by 온자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