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단상'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10.03.15 대학생, 그리고 20대
  2. 2009.02.16 2월 15일 구직 일기 1
  3. 2009.01.09 응, 잘 지내~
  4. 2009.01.01 2008년 12월의 마지막날
  5. 2008.12.20 형아
  6. 2008.12.20 1000원
  7. 2008.12.20 휴대폰
  8. 2008.12.20 내가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2008.2.14)
  9. 2008.12.20 어머니께
  10. 2008.12.20 이별연습
일상의 단상2010. 3. 15. 00:31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이 앞에 처음 "2"가 붙기 시작했을 때, 나는 대학생활에 대해서, 나의 20대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을 뿐이고, 내가 무슨 전공을 선택해야 차후 진로에 유리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의 대학생으로서, 그리고 20대를 살아가는 기준이 생겨났다.


대학생의 특권은 다른 계층보다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고,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생의 의무는 사회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필요할 경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에 적극 나서는 것이다. 20대의 과제는 자신, 그리고 사회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30대 이후를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대학생, 그리고 20대의 축복은 어떤 것을 도전해서 실패하더라도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둘 수 있는 것이다.


그 기준에 날 비추어보면서 그동안 나는 대체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20대 끝자락의 나는 지난 8년이 향후 내 인생을 위한 초석을 쌓았던 시간이라고 믿고 있다.


얼마전 대학교 친구에게 내가 너무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이상적으로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발끈했지만, 마땅한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 대학생, 그리고 20대의 당위를 강조하던 시간동안 코앞에 다가오고 있는 냉혹한 현실을 보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나의 20대를 20년 후에 스스로 어떻게 평가할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잘 되어 있으면 좋게, 못 되어 있으면 나쁘게 평가하는게 자연스러울지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내가 만족스럽지 못한 40대를 살아가고 있더라도 내가 20대에 했던 선택을 부정하면서 살지는 말자고 다짐해본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이상과 가치관을 현실에 반영할 수 있는 접점을 찾는 것이고, 현실적인 감각을 갖추는 일이다. 나의 20대를 후회하지 않기 위해 20대 마지막 1년에 내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9. 2. 16. 01:18
언제부턴가 내게 주말 휴식은 사치일뿐이야, 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주말과 평일의 뚜렷한 구분이 없어져버린 지 오래다.
(학생신분을 벗어나기 전부터 이미 주말은 못했던 일을 마저 하는 시간으로 존재했다.)

지난 이틀도 뭐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어제는 남들 초콜릿 주고 받는 시간에,
학교에서 언론사 스터디하느라, 끝나고 친구가 알바하는 독서실가서 같이 공부하느라 바빴고,
오늘은 이력서용 증명사진 찍고, 이력서 쓰고,
내일 있을 시사상식 발표준비하느라 하루종일 시간을 보냈다.

시간은 참 빠르다.
뭐 한가지 일이라도 할라치면 반나절은 금새 가버린다.
어쩌다 TV에 시선이 고정되면 두 세시간 보내는 것은 기본이다.
그래서 고정적으로 보는 TV 프로그램을 두지 않으려고 한다.

늘 시간이 날 쫓아오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문득 남들도 이렇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바쁜 것처럼 살면서 막상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주말을 주말답게 쉬지도, 놀지도 못했는데,
그렇다고 내가 뭔가 확실하게 끝낸 일도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신나게 놀았더라면 그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을텐데, 지금 난 지난 이틀이 아쉽다.

언제나 치열하게, 열심히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나간 시간에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많이 후회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늘 현재를 생각해보면 바쁘고, 해야할 일들이 버겁다.
이건 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는 형님이 해주신 말씀.. 오늘 태어나 오늘 죽는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살아라.
너무 바쁘게 살지도, 너무 게으르게 살지도 말고, 오늘 하루도 열정적으로 살자.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9. 1. 9. 01:46
아는 동생이 전화를 했다.
"형, 잘 지내요? 그냥 새해되고 나서 안부전화 드렸어요.^^"

"어, 뭐 난 그렇지 뭐.. (다급하게) 올한해 열심히 출발해보려고!!"

며칠전에도 다른 동생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고 같은 답을 한 것 같은데..

잘 지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응, 난 잘 지내지~"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한다.
한 반년 정도 된 것 같다.
말이라도 잘 지낸다고 할 수 있을텐데 그말이 입에서 참 떨어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지 늘 난 의욕적이라고 광고를 해댄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고 살자고 다짐을 했다.
인생 이제 시작인데.. 하며 의지를 불태워보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도졌다. 백수병..
아침에 일어나는 거 별로 즐겁지 않고, 내가 뭘하면서 사는지 한심스럽고,
뭘해도 열심히 하지를 못하고..

2009년 일주일 지났다.
이혁진, 이러지 말자.

부끄러워해야 할 것에 대해서만 부끄러워하자.
수중에 돈이 별로 없는 것, 아직 직업을 구하지 못한 것.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당당하게 살고, 즐겁게 사람들 만나자. 그리고 열심히 살자.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9. 1. 1. 12:44

올 겨울들어 유난히 추웠던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여느 해 같으면 일찌감치 할아버지 댁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했겠지만,
2008년의 마지막날은 조금 특별했다.

평소에도 잘 보지않던 영화를 마지막 날에 본 것도 그렇고,
언론노조 파업을 지지한다고 모여서 보신각 앞까지 간 것도 그렇다.

민언련 분과활동을 같이 하는 친구가 공짜로 보여준 영화는 <이스트 프라미스>
미리 살펴본 줄거리에서 기대한 것과는 달리 영화 전개가 좀 지루하고, 긴장감이 떨어졌다.
오로지 인상에 남는 것은 남자 주인공이 욕탕에서 벌인 결투신.
그럭저럭 재미있게 보고 그 친구와 함께 프레스센터로 향했다.

이미 프레스센터에는 언론노조 분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었다.
나는 민언련 깃발을 찾아 무리속으로 들어갔지만,
오늘 깃발을 만들어 모이자고 했던 <아랑 언론고시 카페> 사람들도 보여 반가웠다.
박석운 대표님을 비롯한 민언련 사람들과 함께
유인물과 손피켓, 스티커, 연필 등을 들고 선전전을 시작했다.

전에 몇번 해본 것이지만 선전전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가슴 앞으로 내미는 손을 매정하게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
다가가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것을 전달하려 하는 것인데도 참 용기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간혹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을 낼 수 있었다.
한편, 종로 여기저기서 MB아웃을 외쳐대며 손피켓을 들고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젠 MB를 씹는 것도 국민 스포츠가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 때와는 달리 좀 위험한 분위기인 것 같아서 걱정이 들기도 했지만..

반면 경찰들의 대응은 갈수록 거꾸로 가는 것만 같아서 더욱 화가 났다.
종로 중심가 골목을 틀어막고 손피켓은 반입이 안된다며,
(어디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반입이 안된다니 뭥미?)
사람들 전체를 일일이 검문하는 가 하면,
보신각 근처 횡단보도 전체를 가로막고 길가던 시민들 다 붙잡아 두기도 했다.
보신각 근처에서 사람들이 반 정부 메시지 담긴 피켓을 들고 TV에 나오는 모습을 원치 않아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잘 했으면 사람들이 해의 마지막 날까지 길거리로 나왔을까..

타종 행사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까지 틀어막고 있는 경찰들 때문에 한참을 돌아내려가면서,
올해에도 참 시끄러울 일 많을 것 같고, 몸조심도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8. 12. 20. 14:50

"형아,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반기신다.

 

'형아'. 내가 일하는 건물을 청소하시는 한 아주머니가 날 부르는 호칭이다. 아주머니를 처음 봤을 땐 죄송하지만 한국 사람이기보다는 동남아시아 사람처럼 보였다. 나를 '형아'라고 부를 때에는 '한국말이 서투른가 보다'하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일한지도 1달이 되어가면서, 이젠 아주머니의 '형아'하고 부르는 소리는 익숙해졌다. 내가 일하는 층을 담당하시는 분이라 매일 마주치는데, 언제나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하시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근무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빵, 우유를 들고 점심 대신 하려던 참에, 아주머니도 휴게실에서 의자에 몸을 기대고 계셨다. 아주머니는 조금 민망한 기색을 보이며,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잠깐 쉬는 중이었어. 곧 점심시간이야." 내가 관리자도 아닌데 눈치를 보며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빵, 우유를 먹는 내게 "고것 먹고 어떻게 일하려고 그래"하며 걱정을 해 주신다.

 

"제가 하는 일이 있나요 뭘" 멋쩍은 웃음을 지어본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아주머니에 비하면 '거저 먹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시간당 받는 돈은 아주머니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 중에 알게 되었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반까지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쉬는 시간이 없는 고된 일상이지만, 아주머니는 늘 웃으면서 일하신다.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것도 하고 싶어서 줄 서있는 아줌마들이 많다고, 자기는 그나마 나은 거라고 하신다. 어머니뻘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안쓰러워 말을 잊지 못했다.

 

대화도 잠시, 나는 일하러, 아주머니는 점심드시러 가야했다. 사무실에 들어서 먼저 분쇄기 통을 확인했다. 아주머니가 가끔 꽉 차있을때 비워달라며 부탁하던 것이 떠올랐다. 통을 비우면서, "형아, 내가 할라구 했는데, 미안하게.."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내가 아주머니를 안쓰러워 하는 것도, 용역업체의 고용 체계를 지적하는 것도, 좀 배웠다는 자의 오만함같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머니의 근로조건을 개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머니와 서로 도와서 수고를 덜어드리는 일이다. 나는 아주머니와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8. 12. 20. 14:50

어려서부터 딸기맛, 바나나맛 종류의 우유를 좋아라 했었는데, 이 놈의 식성은 좀처럼 변하지가 않나보다. 매일 지하철을 탈 때마다, 편의점을 지나칠 때마다 다가오는 딸기우유의 유혹은 좀처럼 뿌리치기 힘들다.

 

가격은 1000원에 100원 모자른 900원.

 

매일 이돈을 쓴다는 건 학생인 나로서는 적은 지출이 아니지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우유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잊어버리고 만다.

 

또 하나 매일 다가오는 1000원의 유혹이 있다.

 

지하철에서 매일 마주치는 구걸하는 분들의 손인데, 이 유혹은 내게 별로 강하게 다가오질 않나보다. 그 사람의 생김새나 행동거지를 보고 진짜 어려운 사람인지 의심부터 하니 말이다. 한창 이것저것 재보는 사이에 그 분들은 벌써 다음 칸으로 넘어간다. 100원을 더 써야 해서 그럴까.. 우유를 살 때랑 참 대조되게 신중한 자세다.

 

항상 주위를 둘러보면서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내 뱃속부터 챙기는 나는 어쩔수 없는 속물이란 생각이 든다. 학생에게 하루 1000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우유사는 마음으로 1000원이 더 필요한 사람을 위해 쓸 수도 있는 것을.

 

하루 1000원씩만 귀하게 쓰기. 이것이 그 어떤 정치적 구호나 운동보다 어쩌면 더 값진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 하루.

 

청소하시는 아주머니 힘내시라고 로얄디 500원,

 

지하철에서 구걸하시는 분께 500원,

 

오늘은 1000원 귀하게 썼다.

 

내일도...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8. 12. 20. 14:48

신문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읽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아주 '특별한' 졸업식에 대한 기사였다. 서울 강서구 등촌 3동의 강서노인종합복지관에서 20여명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상으로 1달간의 '휴대전화 교육'을 실시한 후 수료식을 하는 자리였다. 인터뷰를 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분들은 '폰카'도 찍고, 문자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됐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순간 할아버지의 모습이 겹쳐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몇달 전인가, 할아버지께서 새로 사신 휴대폰을 들고 오시더니, 문자메시지가 많이 왔는데 보는 방법을 모르시겠다며 나에게 물으셨다. 귀찮게 느낀 나는 대충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지만, 못 알아들으셔서 그냥 문자 메시지를 다 지워버린 적이 있다. 내 설명을 못 알아들으신 할아버지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어쩌면 나에게 말붙일 구실로 물어보셨는지도 모르겠다.

 

기사에 따르면, 이젠 휴대폰 교육을 여러 복지관으로 확대해서 이어간다고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복지관을 통해서 휴대폰 사용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한편 씁쓸하기도 하다. 당신들도 분명 자식들이 있을텐데 말이다. 어떤 사회복지 제도보다 최고로 좋은 것은 자식들이 부모님 복지를 책임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자식들이 그런 능력이 없을 땐 국가가 지원해줘야 하겠지만 말이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핸드폰을 전화하고 받는 것으로만 사용하신다. 얼마전엔 액정이 고장났는데도 자식들이 A/S 맡기는 것을 미적미적하느라 꽤나 불편하셨을 것이다. 할아버지 댁에 가면 제일 먼저 휴대폰 사용법을 알려드려야겠다. 그 덕분에 무뚝뚝한 손주와 긴 얘기도 하실 수 있도록 말동무가 되어드려야겠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8. 12. 20. 14:19

"대학 가면 절대로 데모하는 애들하고는 어울리지 마라"

경찰 공무원이셨던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늘상 내게 말씀하셨다. 그때는 왜 그렇게 그 말을 강조하시는지 알지 못했지만,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운동"하는 대학생들은 빨갱이라는 반공주의식 사고가 철저히 몸에 베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경영에 접목시킨 스포츠경영이라는 전공을 택해서 좋은 회사에 들어가는 것, 그것이 내 대학생활의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만난 사람은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고(그땐 알지 못했지만), 난 그들과 어울리면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것을 모를 때, 아는 선배가 경찰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무작정 경찰서로 항의 방문을 가던 때를 기억한다. 사실 방문이라기 보다는 침투에 가까울 정도로 분위기는 살벌했다. 좁은 인도변에서 우리를 가로막고 방패로 무자비하게 때리던 내 또래들과 그들 뒤에 있었던 경찰들 역시 나는 기억한다. 경찰이 수호한다고 하는 사회 질서라는 것이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는구나 하고 느꼈던 시간이다. 그 후로 여러번 나는 그들이 지키는 사회 질서와 충돌하게 되었다.

 

사회가 저절로 올바르게 굴러가지 않는다면 누군가 나서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운동"이라 부른다면 운동은 분명 필요한 것이고, 나 또한 거기서 열외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간의 의식교육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운동"이라는 말엔 약간의 거부감이 느껴진다. 노동운동이든, 시민운동이든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소수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내가 운동에 더 적극적이 되는데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렇게 운동이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매도당하는 데엔 대한민국의 언론의 상당한 영향력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난 언론사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의 펜으로 나름의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보세력에게 아군이기보다 적에 가까운 언론의 진영에 들어가 적진에서 아군을 돕는 임무를 내가 해내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열심히 한다면 그 적을 아군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것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은 얼마 안 지나서 깨닫게 되었지만..

 

지금은 기자라는 직업이 사회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사회에 득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칠 수도 있는 것이 기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대한민국 사회가 정의로워지기 위해서는 언론부터 바로 서야한다는 것이다. 언론인이 된다면 적어도 그런 고민은 늘상 하면서 살게될 것이다. 그리고 나름의 해법을 찾아 나만의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이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8. 12. 20. 13:54

차마 말씀 못드렸어요.

애초에 기대하지 말자며 엄마 역시 제게 물어보지 않으신 것 같지만요.

혹시라도 잘 나오면 놀래켜 드리려고 했는데, 역시 결과는 냉정하네요.

오늘 누나 생일이고 해서 최대한 티 안내려고 노력했어요.

다행히 엄마는 이미 잊어버리고 계신 것 같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다가 방에 들어와보니,

"죄송하다"는 말이 목덜미까지 차오르네요.

 

요즘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제 비위 맞추시느라 아무런 말씀 없으신 것 알아요.

술 처먹고 새벽에 들어와도, 아침 10시까지 침대에서 나올 생각 안 해도,

항상 엄마는 지가 알아서 하겠거니 하시잖아요.

혹시라도 제 기분 상할까봐 이젠 언론사 관련된 얘기는 제 앞에서 꺼내지도 않으시고,

앞으로 뭐할거니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하루종일 엄마와 집에 같이 있을 때에도,

방에 처박혀 나오지도 않고 뭘 하는지 궁금한데 물어보지도 못하시고요.

엄마하고 얘기하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요.

그냥 좀.. 죄송해서 그래요..

 

오늘로서 올해 언론사 시험에서 모두 낙방하게 되었네요.

제가 인정하기 싫은 것보다 엄마가 훨씬 인정하기 싫은 것 알아요.

그렇게 잘난 아들이었는데.. 다른 엄마들에게 얼른 자랑하고 싶었는데..

자꾸 제가 저 믿으라고 그래도 이젠 솔직히 좀 걱정되시죠?

얘가 취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솔직히 저도 많이 불안해요.

이런 불안한 마음 엄마한테 털어놓으면서 어리광도 부리고 싶어요.

아직 엄마 아들 나이만큼 성숙하진 못했거든요.

 

다시 마음 다잡을게요.

조만간 잘 웃고, 얘기도 많이 하는 아들의 모습으로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Posted by 온자매 아빠
일상의 단상2008. 12. 20. 13:54

문득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 볼 때마다,

아름다운 기억을 먼저 떠올리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 "사랑해"라는 말을 했었던 사람,

여고생 마냥 말도 못하게 예민했던 내 고등학교 2,3학년 시절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

함께 했던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아도,

내 고등학교 시절을 따뜻한 느낌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해주는 그녀에게

이따금씩 고마워하곤 한다.

 

그녀와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다.

휴대전화번호, 이메일주소, 미니홈피주소까지 소통가능한 모든 루트가 단절되었다.

그녀와 연락을 끊은 건 나였다.

2007년 봄 그녀를 2년여만에 만난 다음 날부터였다.

그녀를 만나러 갈 때부터 그날이 그녀와 이야기하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와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를 그냥 추억 속에 간직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2001년 5월에 헤어지고, 근 6년간을 친구 사이로 지냈다.

그렇게 가깝지도, 아주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는데,

가끔씩 내가 대뜸 과거 얘기를 꺼내서 그녀에게 연거푸 상처를 주곤 했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인지도 몰랐던 나는 정말 뭣도 모르고 어리기만 했던 것 같다.

가끔씩 내가 저지르는 '입방정'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얇은 벽'을 사이에 둔 조금 불편한 사이로 지냈다.

 

내가 군대를 가고, 제대를 하고, 그사이 그녀는 취직을 하고 그러면서,

조금씩 그녀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던 것 같다.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 여린 마음보다는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와 대화하면서 가끔씩 아프게 다가오는 그녀의 말은,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주었던 상처, 헤어지고 난 후에 주었던 상처를 그대로 되받고 있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더이상 직장인이 된 그녀는 내 기억속의 그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좋았던 기억마저 다 더럽혀질 것 같은 두려움에 그녀를 추억 속에만 남겨두기로 했다.

 

얼마전 또 한 사람을 떠나 보냈다.

1년이 좀 못되게 함께 지냈던 사람이다.

이놈의 입방정은 나이가 먹어도 도무지 고쳐지지가 않나보다.

한번 상처주면 될 것을 두번 세번 상처 줘가며 관계를 끝내버렸다.

그러기는 싫지만 그녀 역시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이 될 것 같다.

내가 그녀 기억 속의 내 모습, 그녀 모습을 온통 더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스물일곱살, 아직 사랑이 뭔지 잘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별하는 연습 한참 더 해야겠다고 되뇌인다.

Posted by 온자매 아빠